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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Eucharist)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의례 중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들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고 선포하신 사건은, 이후 모든 기독교 전통에서 신앙의 중심 행위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단순한 기념이나 종교적 상징을 넘어, 인간 존재와 공동체,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관련된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본 글에서는 성찬의 성경적 기초와 신학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역사 속 다양한 해석을 고찰하며, 현대 신앙생활에서 성찬이 지니는 존재론적·윤리적 함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경적 기초: 최후의 만찬과 새 언약
성찬의 직접적 기초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최후의 만찬(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20)과 사도 바울의 언급(고전 11:23-26)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며,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때 사용된 언어는 단순한 상징 이상의 깊이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는 직접적 선언은, 단순한 비유적 표현을 넘어 실제적 참여(real participation)를 암시합니다. 바울은 성찬을 가리켜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찬을 통한 신앙 공동체의 존재적 통합을 강조합니다(고전 10:16-17).
따라서 성찬은 단순한 추억이나 교훈적 재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현재적으로 공동체 안에 실재하는 신비로운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2. 신학적 의미
성찬은 여러 신학적 차원에서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다양한 차원은 성찬의 신비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1) 기억과 현재화(Anamnesis)
성찬은 단순한 과거 사건의 기억이 아니라, 그 사건을 현재에 다시 실현하는 '현재적 기억'입니다. 헬라어 '아남네시스'(ἀνάμνησις)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 이상으로, 과거 사건의 능력을 현재 속에 불러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현재적 사건으로 재현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다시 구원의 현실 속으로 참여시키는 신비입니다.2) 공동체 형성과 일치(Koinonia)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떡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이지만 한 몸이다"라고 말합니다. 성찬은 신앙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유기적 결합의 사건입니다. 성찬을 나누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 체험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책임과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참여를 의미합니다.3) 종말론적 희망(Eschatological Anticipation)
성찬은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는 행위가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함께할 천국 잔치를 미리 맛보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 나라에서 새롭게 마실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를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하시며, 성찬이 종말적 희망과 연결되어 있음을 명확히 하셨습니다.4) 존재론적 변화(Transformation)
성찬은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되게 참여함으로써 신자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며, 신적 생명(divine life)에 접속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상징적 변화가 아니라, 존재론적 변화를 지향하는 신비적 사건입니다.3. 역사적 이해. 성찬 논쟁과 교파별 입장
성찬에 대한 이해는 교회사 내내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각 시대와 교파마다 성찬의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1) 가톨릭 교회: 화체설(Transubstantiation)
중세 스콜라 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찬에서 "본질이 변화"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떡과 포도주의 외형(속성)은 그대로 남지만, 본질(substance)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오직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성사의 신비'(sacramentum)로 간주되었습니다.2) 루터교: 공재설(Consubstantiation)
마르틴 루터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와 함께, 안에, 아래에" 실제로 임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성만찬 안에 실재한다고 믿으면서도, 화학적 변화를 주장하는 가톨릭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3) 개혁교회: 상징설(Memorialism)과 영적 임재설
쯔빙글리는 성찬을 단순한 기념으로 보았고, 칼뱅은 "성령을 통한 영적 임재"를 주장했습니다. 칼뱅은 성찬이 단순한 인간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생명에 실제로 참여하는 사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성찬은 단순 기념이나 변형된 신비주의가 아니라, 신적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4) 정교회: 신비적 실재(Mystical Realism)
동방정교회는 서구 스콜라주의적 설명을 거부하며, 성찬의 신비를 신비 자체로 존중합니다. 그들은 성찬을 단순히 본질 변화나 상징으로 규정하지 않고, 거룩한 신비로서 성령의 역사 안에 이해합니다.4. 현대적 적용: 성찬의 존재론적, 윤리적 함의
오늘날에도 성찬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삶 전체를 변형시키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1) 존재론적 변화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는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이는 신앙의 체험을 넘어, 인간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으로 재창조되는 신비로운 경험입니다.2) 공동체적 책임
성찬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교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책임지고 사랑하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짊어지는 존재로 부름받는 사건입니다. 사회 정의와 사랑의 실천은 성찬의 필연적 결과입니다.3) 종말적 소망
성찬은 이 세상 질서의 완성이 아니라,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예고편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종말의 새 창조를 소망하고 준비하는 영적 훈련입니다.성찬은 단순한 전통이나 의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 속으로 초대하는 살아 있는 신비입니다. 성찬은 과거의 구속 사건을 현재 속에 불러오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으며, 개인을 변형시키고, 세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소망을 선포합니다.
오늘날 성찬은 여전히 인간 존재의 참된 의미, 공동체적 책임, 그리고 하나님의 새 창조를 향한 부르심을 새롭게 일깨우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단순히 하나의 종교적 행위를 넘어, 삶 전체가 변형되는 존재론적 여정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사건을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사랑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며, 세상의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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