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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진리란 무엇인가: 고전 철학에서의 ‘절대’를 향한 갈망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오래되고도 본질적인 물음 중 하나다. 이 질문은 단순히 어떤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묻는 판단 기준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와 세계 인식의 토대를 다루는 문제로 확장된다. 특히 ‘절대 진리’란 어떤 시대, 문화, 개인의 신념과 무관하게 항상 동일하며 보편적 효력을 지니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고전 철학의 핵심 주제이자 이후 철학 전통 전체의 기초를 이룬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러한 절대성을 인간 인식 너머의 초월적 차원에서 탐색하려 하였다. 플라톤은 “진리는 감각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변하고 사라지는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이데아(Idea)의 세계를 주장하였다. 이데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본질’이며, 물질 세계는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모든 ‘의자’는 각각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의자의 이데아’를 반영한 불완전한 형태일 뿐이다. 진리는 이 이데아의 차원에 존재하며, 그것은 시간과 공간, 감각의 조건을 초월한 불변의 실재이다. 플라톤에게 진리를 아는 것이란 곧 이 이데아의 세계를 ‘기억’하는 것이며, 철학은 그 기억을 되찾는 정신적 수련의 과정이다. 그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감각의 세계는 단지 불완전한 그림자일 뿐이고, 진정한 앎은 태양빛 아래 드러난 실재를 보는 것에 비유했다. 이처럼 플라톤 철학은 절대 진리를 초월적 실재로 규정하며, 인간 이성의 작용을 통해 그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반해,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초월적 세계보다 현실 세계 자체의 논리와 질서에 주목했다. 그는 실체(substance)의 존재론과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전개하였다. 진리는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 차원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에 내재한 형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즉, 진리는 존재하는 사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행위 속에 있으며, 이는 경험과 관찰, 논리적 귀납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른바 ‘정의(defini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세계에 대해 내릴 수 있는 모든 판단은 정확한 언어와 논리 체계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리를 “사물에 대해 그것이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진리를 주관적 해석이 아닌 객관적 지식의 결과로 이해하는 고전적 사고의 기초를 형성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접근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진리를 단지 ‘관점이나 의견’이 아닌 객관적이며 불변하는 기준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는 훗날 기독교 철학이나 중세 스콜라 철학이 진리를 절대적 실재로 이해하고, 이성과 계시를 통해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고전 철학은 인간이 단지 감각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사유, 논증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이 신념은 ‘진리는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즉, 진리는 변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것을 찾을 수 있고, 마침내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고전적 철학이 절대 진리를 논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단지 고대인의 사유 방식이 아닌, 현대의 과학, 윤리, 신학이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인식의 전제이기도 하다.
2. 절대 진리에 대한 도전: 해체의 철학과 상대주의
근대 이전까지 진리는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 이성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가 철학 전통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근대 철학의 전개, 특히 계몽주의, 실존주의, 구조주의를 거치며 진리는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있던 ‘절대성’은 철저히 의심받고 탈구축되었다. 절대 진리는 권위의 상징으로 간주되었고, 보편적 기준이라는 말은 특정 계급과 문화가 자신들의 가치 체계를 보편화하는 억압의 방식으로 비판받게 되었다. 이 흐름의 시작점에는 니체가 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절대 진리의 붕괴를 철학사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표현한 인물이다. 니체에게 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진리를 창조하고 해석하는 존재다. 진리는 본래부터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해석과 힘의 산물이며, 그것은 항상 누군가의 ‘관점적 진술’일 뿐이라는 것이 니체의 사상 핵심이다. 이러한 관점은 진리를 주관화하고 상대화하는 데 결정적인 사상적 전환점을 제공했다. 진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절대적이라 믿는 순간 인간은 진리가 아니라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는 비판이 등장한다.
이후 미셸 푸코는 니체의 관점을 계승하면서 진리와 권력의 관계를 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분석하였다. 푸코에 따르면 진리는 특정 시대와 담론 구조 속에서 ‘정상화’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권력에 의해 구성되고 통제되는 지식 체계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지식-권력’ 이론에 따르면, 절대 진리란 근본적으로 허구이며, 인간은 항상 특정한 사회적 장치 속에서만 진리를 말하고 구성한다. 따라서 어떤 담론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 이면에는 그 담론을 유지하고 지배하는 권력 체계가 존재한다. 푸코의 철학은 진리를 권력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절대성 자체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진리는 주체가 아니라 구조가 만든 ‘사실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푸코의 맥락을 이어받아 진리를 언어의 산물로 해체하였다. 데리다는 언어가 항상 ‘차연(différance)’ 속에서 의미를 지연시키고 미끄러지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텍스트와 언어는 결코 고정된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결국 진리는 언어를 통해 고정되거나 절대화될 수 없으며, 모든 진술은 끊임없는 해석과 재해석, 전복의 가능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사유는 '진리는 단 하나'라는 서양 고전 전통의 전제를 무력화시키며, 진리란 끊임없이 의미가 흔들리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인식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철학적 흐름은 현대 대중문화와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쳐, ‘당신의 진리와 나의 진리는 다를 수 있다’는 발상이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은 해석이다’, ‘진리는 구성된다’, ‘보편은 폭력이다’와 같은 구호는 더 이상 학술 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윤리와 교육, 언론, 예술,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절대 기준에 대한 거부와 해체의 흐름을 낳았다. 이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진리를 탐색하거나 고백하기보다, 그것을 상대화하고 의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해체한 후 남는 공백과 방향 상실이라는 위기를 낳기도 한다.
절대 진리를 해체한 철학은 인간에게 자유와 비판적 사유의 도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진리의 기반 위에 서 있던 윤리적 책임, 도덕적 일관성,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공통된 확신을 약화시켰다. 철학은 진리를 절대화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대가로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만들어냈다. 결국 철학은 스스로에게 되묻기 시작한다. 진리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놓쳤을 뿐인가? 이 질문은 다음 단락에서 다룰 것처럼, 과학과 윤리, 신학을 통해 다시 제기되며 절대 진리의 복권을 모색하는 철학적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3. 과학과 윤리 속의 절대성: 진리를 둘러싼 역설
절대 진리가 해체되었다고 주장되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진리를 요구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간다. 흥미롭게도,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이론들이 지배하는 가운데에서도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절대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철학이 직면한 역설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학과 윤리이다. 과학은 실증과 검증, 반복 가능성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려는 체계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과학은 진리를 상대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론은 가설로부터 출발하고, 반증될 수 있으며, 시대에 따라 수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동성 자체가 과학이 절대 진리를 포기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과학은 자연 법칙이 일정하고, 세계가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보편적 전제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연구하고 우주선을 쏘아올리는 것은 내일도 중력이 동일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신뢰는 실험으로 ‘증명된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적 세계관의 절대적 전제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뉴턴 역학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수정되었다고 해서 진리가 해체된 것은 아니며, 이는 오히려 진리에 대한 더 깊은 접근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과학은 어떤 형태로든 변하지 않는 질서, 보편적 규칙, 수학적 상수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즉, 과학은 방법론적으로는 유연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절대 진리를 전제한 체계다.
윤리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는 문화 상대주의, 가치 다양성, 다원주의를 중요시하며, 개인의 윤리적 판단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옳은 것'과 '절대적으로 나쁜 것'을 구분하려는 내면의 직관을 가지고 있다. 살인, 강간, 고문, 사기, 인종차별 등의 행위를 우리는 단지 ‘문화적 선택’이나 ‘시대적 배경’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행위는 어느 시대와 장소에서도 잘못된 것이라 느낀다. 이는 보편적 도덕 직관이며, 윤리학이 존재하기 위한 근거이다. 우리가 인권을 주장하고, 정의를 부르짖고, 불의를 고발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그 바탕에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문화에서 도덕 기준은 다르게 설정될 수 있지만,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는 전제는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도 기본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즉, 윤리도 궁극적으로는 어떤 ‘절대 가치’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세속시대』에서 현대 사회가 아무리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외쳐도, 도덕 판단의 기반에는 언제나 궁극적 지향이 있으며, 인간은 그것 없이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윤리적 정당성은 단순히 여론이나 권력의 산물이 아니며, 사회적 계약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 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전제된 신념, 즉 어떤 차원에서는 종교적 의미를 내포한 진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윤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 공의와 불의라는 절대적 구분이 가능해야 하며, 이 구분을 부정하면 윤리는 곧 무의미해진다.
이처럼 우리는 이성적으로는 절대 진리를 해체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천적으로는 여전히 그것을 전제하고 살아간다. 과학은 질서와 논리의 보편성을 가정하고, 윤리는 도덕적 판단의 보편타당성을 전제로 한다. 이 둘은 모두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를 잃는 체계다. 결국 이 모순은 우리가 진리를 부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진리 없이 살 수 없다. 진리는 인식의 체계일 뿐 아니라, 행동의 기준이자 존재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제 이 역설 앞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진리를 해체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것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력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진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다음 단락에서는 이 진리의 근원을 신학적 차원에서 고찰해볼 것이다.
4. 신학적 절대 진리: 인격적 존재로서의 진리
앞선 철학적 탐색을 통해 우리는 절대 진리가 해체된 시대에도 여전히 과학과 윤리의 기반에 절대성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철학과 인문학이 진리를 개념이나 구조로만 탐색하는 반면, 기독교 신학은 진리를 보다 존재론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다룬다.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는 단지 어떤 명제의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논리적 규칙이나 개념적 도식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격이며, 스스로 존재하고 드러나는 실재 그 자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언한다. 이 구절은 기독교가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진리는 ‘그것’이 아니라 ‘그분’이며, 개념이 아니라 관계이고,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대상이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분의 율법은 진리이며, 그분의 아들은 진리이다. 이는 진리가 절대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이며, 관계적이고,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런 이해는 고대 철학의 진리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플라톤에게 진리는 감각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이데아였다면, 기독교에게 진리는 세상 안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 곧 성육신한 말씀(로고스)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진리는 추상적 논리가 아닌 구체적 사건이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역사와 인간 존재에 개입한 실체다. 이는 진리 개념에 중대한 전환을 의미한다. 진리는 탐구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계시되고 받아들여져야 할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인간을 붙드는 방식으로 관계가 성립한다.
이와 같은 인격적 진리 이해는 윤리적 차원에서도 결정적인 함의를 갖는다. 만일 진리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진리는 선하고 정의롭고 거룩한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인간의 윤리적 삶은 그 진리와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이로써 진리는 단지 존재론적 실재일 뿐 아니라 윤리적 기준이자 삶의 목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되리라’(요 8:32)는 말씀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리는 억압적 규칙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해방이며, 관계의 회복이며, 죄와 거짓에서 벗어나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구원론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구원은 단지 죄의 사함이 아니라 진리로 초대되는 것,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며, 그 관계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참된 존재로 완성된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절대 진리를 사변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삶 속에서 경험되고 인격적으로 응답되어야 할 실체로 제시한다. 진리는 신비롭지만 닫혀 있지 않고, 높지만 멀지 않으며, 거룩하지만 무관하지 않다. 그 진리는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며, 사랑과 정의의 방식으로 인간을 부르신다. 이런 점에서 진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 ‘만나게 되는 것’,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 진리는 논쟁의 대상이기 이전에 응답의 대상이며, 존재의 기준이자, 모든 실재의 중심이다. 이 진리는 문화나 언어, 시대를 초월하며, 철학과 과학, 윤리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질문에 답해 왔고, 여전히 살아 있는 진리로 인간을 초대한다. 철학이 진리를 찾는 여정이라면, 기독교 신학은 그 진리가 먼저 우리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인격이기에, 우리는 단지 이해할 뿐 아니라 사랑하고 따라야 할 존재로 마주하게 된다.
절대 진리는 단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이끄는 기준이자 중심이다. 비록 현대 철학은 진리를 해체하고 상대화했지만, 과학과 윤리, 일상과 신앙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어떤 기준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는 이 진리를 단순한 개념이 아닌 살아 있는 인격, 곧 하나님 자신으로 고백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우리 삶을 설명하는 논리가 아니라, 우리를 초대하고 변화시키는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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