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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급변하는 현대 사회는 전통적 가치와 종교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편하고 해체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믿는 자로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습니다. 세속화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문화 속에서 신앙인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으며, 교회 바깥에서도 그 정체성을 일관되게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본 글은 성경과 역사, 실천적 신앙을 바탕으로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자아와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다각도로 고찰하고자 합니다.
1. 정체성의 위기: 세속화 시대의 신앙인의 자리
21세기의 신앙인은 정체성의 혼란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독교 문화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신앙을 자연스럽게 삶의 중심으로 삼을 수 있던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포스트 기독교 사회'라는 말이 일반화되었을 만큼, 기독교적 가치가 공적 영역에서 점차 밀려나고 있습니다. 미디어, 교육, 정치, 경제 전반에 걸쳐 세속적 가치가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이는 신앙인에게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경건하게 신앙을 지키던 이들이 사회로 나가면 신앙의 언어와 삶의 태도를 잊어버리는 이중적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다원성과 상대주의를 강조하며, 절대 진리나 도덕 기준에 대한 확신을 비판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지닌 배타적 진리 주장, 윤리적 기준은 '편협'하거나 '비포용적'이라는 비판을 받기 쉽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앙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온라인 공간에서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것이 사회적 위험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시선과 평가에 맞추려는 ‘문화적 기독교’가 확산되고 있으며, 이는 내면의 신앙과 외적 행동 사이의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단지 외적 환경 때문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스스로의 믿음을 존재론적 기반 위에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인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자기 인식과 신학적 성찰이 부족한 상황에서, 신앙은 단지 습관이나 문화로 전락할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곧 삶의 방향 상실로 이어지고, 그 결과 기독교인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은 새로운 방식의 정체성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지 과거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복음의 진리 위에 자신을 세우는 작업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 고백과 교회 밖에서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될 때,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위기가 아닌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은 고립이 아닌 소통을 전제로 하며, 세상을 부정하거나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렌즈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살아가는 적극적 증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세상 속에 있는 자'의 의미
성경은 신자의 정체성을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규정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린 중보기도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오나…”(요 17:15-16). 이 말씀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이중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세상’이라는 성경적 개념은 단지 지리적 또는 사회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질서, 곧 자기중심적 욕망과 타락한 가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세상의 탐욕과 교만, 육신의 정욕이 하나님과 대적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고, 그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불렀습니다(마 5:13-14). 이 긴장 속에서 신자는 단지 세상을 떠나 도피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고 증거하는 사명자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을 뚜렷이 구현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다신교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으로 구별된 삶을 살았으며, 동시에 공동체와 사회를 섬기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존재하였습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그들은 세상 속에 있으되,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정체성과 역할을 명확히 비춰주는 모델로 작용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신자가 세상과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 속에 있으되 세상의 방식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관을 따르는 존재로 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고립과 동화의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영적 긴장 속에 놓이게 합니다. 그러나 이 긴장은 신자의 정체성을 더욱 단단히 세우는 자양분이 되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근력을 키우는 실천의 장이 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 대한 도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현장 사역자’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3. 이중 시민권: 하늘 나라와 땅의 삶을 살아내기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이중 시민권자'입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살아갑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선포하며, 신자가 궁극적으로 속한 공동체는 이 땅의 정치적, 문화적 소속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며, 이 세상 속에서 직업을 갖고, 가정을 이루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은 하늘과 땅, 영원과 현재 사이에서 정체성을 조율하며 살아가야 하는 긴장 속에 놓입니다.
이 이중적 정체성은 단순히 두 세계 사이의 타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 임한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 세상의 현실과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는 능동적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태복음 22:21)고 말씀하시며, 신자가 세상 질서에 책임 있게 참여하면서도,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신앙인으로서의 소명을 동시에 지녀야 함을 보여주는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역사 속의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 예컨대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두 도성'(civitas Dei vs. civitas terrena)의 긴장 속에서 신앙인의 정체성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의 도성은 지나가는 것이며, 궁극의 소속은 하나님의 도성임을 강조하면서도, 신자는 이 땅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할 윤리적 책임을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인이 탈세속적 도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세속적 가치에 포섭되지 않도록 영적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이중 시민권자로서, 세상의 시스템 안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하는 동시에, 하늘의 기준으로 세상의 문제를 비판하고 치유하는 사명자여야 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환경 등의 문제 앞에서 중립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관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하늘 시민권자'로서의 삶입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깊은 책임감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하늘 나라의 가치로 이 땅을 변혁해 나가려는 일관된 실천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4. 공동체와 책임: 개인 신앙을 넘어서는 사회적 정체성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혼자 살도록 창조하지 않으셨고, 구원 또한 단지 개인의 내면 변화에 그치지 않으며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그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몸’(고린도전서 12:27)이라 부르며, 각 지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단지 ‘나’의 믿음을 지키는 데에 머물지 않고, ‘우리’라는 연대 속에서 형성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가 강조하는 개인주의와 자기실현의 가치 속에서도, 기독교 신앙은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적 연대라는 보다 넓은 시야를 요구합니다.
공동체적 정체성은 곧 책임의 정체성입니다. 이웃을 향한 책임, 세대를 향한 책임, 자연과 사회를 향한 책임은 단지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태복음 25:40)고 말씀하시며, 신앙의 진정성은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물질을 나누고, 서로를 돌보며, 고난 속에서도 함께 울고 기뻐하는 실천적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모델은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신자는 단지 ‘믿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의 사회적 정체성은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정의와 생명을 위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미가서 6장 8절은 “정의를 행하며 인애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합니다. 오늘날 신앙인은 단지 도덕적으로 고결한 개인으로 머무르지 않고, 공공의 선을 위하여 연대하며, 사회 구조 속에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신앙의 사회적 실천이며, 믿음을 일상과 제도, 문화 속에 녹여내는 책임의 사역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공동체 없는 고립 속에서 성숙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립되며, 신앙은 사랑과 섬김을 통해 실재로 드러납니다. 공동체는 신자의 영적 정체성을 시험하는 장이자,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장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혼자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며, 그 안에서 신앙은 이념이 아닌 삶이 되고, 고백이 아닌 실천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세속화, 다원주의, 개인주의 속에서 흔들리고 있지만, 바로 그 긴장 속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나야 할 소명입니다. 성경은 신자를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부르며, 하늘 시민권을 가진 이중적 존재로서 이 땅에서 책임 있게 살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단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책임을 실천하며, 세상의 가치에 대응하는 대안적 삶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고백을 넘어 삶으로 번역되어야 하며, 교회 안과 밖에서 하나된 정체성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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